보리수는 꽃피어 만발하고 시냇물은 소리내어 흘렀지 그리고 소녀의 두 눈은 뜨겁게 불타 올랐다네 하지만 친구여, 모든 것은 지나간 일 일뿐
그 시절 생각나면 다시 한 번 보고싶고 다시 비틀거리며 돌아가 아무 말 없이 그녀 집 앞에 서있고 싶네
9. 도깨비 불
깊은 바위틈에서 도깨비 불이 나를 유혹하네 하지만 도망칠 곳을 찾는 일에 신경을 쓰진 않아
길을 잘못 드는 건 이제 익숙한 일 모든 길은 어디론가 통하게 되어 있으니 우리의 슬픔도, 우리의 기쁨도 모두 도깨비 불의 장난일뿐
격류가 흐르던 메마른 시내를 따라 조용히 길을 내려가네 모든 냇물이 바다를 만나듯이 모든 고뇌도 죽음을 맞는 법
10. 휴식
누워서 휴식을 취하려 하니 내 얼마나 피곤한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아 황량한 길을 따라 방랑하는 건 차라리 즐거운 일
그냥 서 있기에는 너무 추워서 두 발이 휴식을 원하지 않고 세찬 바람이 등을 밀어주니 등짐도 무겁지 않아
비좁은 숯장이의 움막에서 휴식처를 얻었네 하지만 상처가 화끈거려서 사지가 편치 못하네
투쟁과 격정속에 거칠게 맞섰던 나의 마음이여 너 역시도 고요함 속에서야 비로소 찌르는 듯이 아픈 상처를 느끼는구나
11. 봄 꿈
나는 꿈꾸었네 마치 5월처럼 화사하게 핀 꽃들을 나는 꿈꾸었네 싱그러운 새들의 지저귐을
닭이 우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세상은 춥고 음습해 지붕 위에선 까마귀가 울어대고
누가 창유리에 꽃잎을 그려 놓았을까? 혹시 한 겨울에 꽃을 본 몽상가를 비웃지는 않을는지?
나는 사랑을 위한 사랑을, 아름다운 소녀를 진실한 마음과 키스를 기쁨과 축복을 꿈꾸었네
닭이 울어 내 마음이 깨어나면 여기 홀로 앉아 꿈을 되새겨 보리
눈을 다시 감으니 아직 가슴은 따듯이 뛴다. 창가에 나뭇잎 푸르를 날 언제인가? 내 사랑하는 이 안아볼 날 언제인가?
12. 외로움(고독)
전나무 가지 위에 미풍이 불 때 어두운 구름이 청명한 하늘을 가로지르듯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나의 길을 가네 즐거운 삶을 지나 외롭고 쓸쓸하게
아, 하늘이 이토록 고요하다니 세상이 이토록 찬란하다니 폭풍우가 몰아 쳤을 땐 이처럼 비참하진 않았는데
13. 우편마차
거리에서 우편마차의 나팔 소리가 들린다. 왜 그토록 흥분하는 건가? 나의 마음이여
너에게 온 편지는 한 장도 없는데, 왜 그토록 초조해 하는가? 나의 마음이여
그렇지, 우편마차는 바로 그 도시에서, 한때 내가 그녀와 사랑을 나눴던 바로 그 도시에서 온 것이지
다시 한 번 살펴보고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는가?
14. 백발
서리가 머리에 내려 하얗게 덮어 버렸네 이제 늙었구나 하고 한없이 기뻐했네
그러나 서리는 이내 녹아버리고 머리는 다시 검게 되었네 나의 젊음이 한없이 슬퍼지니 도대체 죽을 날은 언제 오려는 것일까?
저녁놀이 질 때부터 아침햇살이 비추일 때까지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된 사람도 많건만 기나긴 여정 속에서도 머리칼이 변치 않았으니 이 사실을 믿는 자 아무도 없으리
15. 까마귀
마을에서부터 나를 따라오는 까마귀 한 마리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머리 위를 맴도네
까마귀여, 불가사의한 짐승이여 내게서 떠나지 않으련? 혹시 내 육신을 먹이로 삼으려는 건 아니겠지? 이제 나는 지팡이에 기대어 더 이상 걸을 수도 없어 까마귀여 내가 죽을 때까지 충실함을 보여다오
16. 마지막 희망
여기저기 나무 위에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나뭇잎 종종 나는 나무 앞에 서서 상념에 잠겼지
나의 희망을 실은 한 장의 나뭇잎을 보네 바람이 나의 나뭇잎을 희롱하면 나는 치를 떨 수밖에
아, 나뭇잎이 떨어지면 나의 희망도 같이 떨어지네 나 역시도 바닥에 떨어져 내 희망이 묻힌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리네
17. 마을에서
개는 짖어대고, 사슬 소리 요란한데 사람들은 잠을 자고 있구나 사람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꿈꾸는 법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그것으로 원기를 회복하네
물론 아침이 되면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 꿈을 즐기며 무언가 남아있기를 기대해서 다시 베개 위를 뒤척인다
짖어라 개들아, 마음대로 짖어보렴 잠자리에 들 시간에도 쉴 수 없게 말이야 나는 모든 꿈을 끝내 버렸으니 자고 있는 사람들 틈에 있을 필요가 없겠지
18. 폭풍우 치는 아침
폭풍은 하늘이 걸치고 있는 잿빛 옷을 갈기 갈기 찢어놓고 자잘한 다툼속에 조각난 구름들이 나부끼고 있구나 붉은 화염이 그 사이에 번쩍이니 이것 이야말로 내게 어울리는 아침의 모습이어라
내 마음은 하늘에 그려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있네 이것이 바로 겨울이지 춥고 난폭한 겨울이지
19. 환영
정겨운 빛이 내 앞에서 춤을 추고 나는 이리저리 그 빛을 쫓아가네 방랑자를 홀리는 빛이련만 나는 기꺼이 그 빛을 따라가네 아, 화려한 속임수에 몸을 맡기는 나처럼 가련한 자 어디 있으랴 얼음과 밤과 공포의 뒤편에는 사랑스런 영혼이 살고 있는 따스한 집이 있어 오직 환영만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
20. 이정표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을 왜 나는 피하는 걸까? 숨은 길을 찾기 위해 왜 눈 덮인 높은 절벽을 지나는 걸까?
사람들에게 부끄러워 해야할 그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어떤 어리석은 욕망이 나를 황무지로 내모는 걸까
길 한 모퉁이에 이정표가 서있어 마을로 가는 길을 가리키네 하지만 나는 쉴 틈 없이 휴식을 찾아 하염없이 방황하네
이정표 하나가 내 앞에 서 있네 꼼짝도 않고 내 앞에 서 있네 나는 가야만 하네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은 길을
21. 여인숙
내가 택한 길은 나를 무덤으로 인도했네 나는 생각했지 이곳의 투숙객이 되려고
파릇한 죽음의 화환은 분명 지친 방랑자를 차디찬 여인숙으로 인도하는 징표이겠지
하지만 이 여인숙도 손님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닐까? 나는 맥없이 쓰러지네 큰 상처를 입어 곧 죽을 것만 같네
무정한 주인이여 정말 나를 거절하려는가? 나의 충실한 지팡이여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앞으로 가보자
22. 용기
눈이 얼굴에 내리면 그것을 털어 버리자 내 마음이 이야기하면 기꺼이 노래를 부르자
뭐라고 말하는지 들을 수 없어 나는 귀가 없으니 뭐라고 탄식하는지 알 수 없어 탄식은 바보들을 위한 것이니까
세상풍파에 맞서 모든 것을 즐기자 세상에 신이 없다면 바로 우리가 신인 것을
23. 환상의 태양
하늘에 세 개의 태양이 떠있어 오래도록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았네 마치 내게서 멀어지지 않으려는 듯 그들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네 아, 그러나 그대들은 나의 태양이 아니야! 차라리 다른 이의 얼굴을 보아라 물론 나 역시도 세 개의 태양을 얻었지만 좋았던 두 개는 지고 말았지 그러나 세 번째 역시 가라앉는 게 좋겠어 어둠 속이 나는 훨씬 편하거든
24. 거리의 악사
마을 저편에 손풍금을 연주하는 노인이 서 있어 곱은 손으로 힘껏 손풍금을 연주하고 있네 얼음 위에 맨발로 서서 이리저리 비틀거리네 조그마한 접시는 언제나 텅 비어 있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쳐다 보지 않네 개들은 그를 보고 으르렁거리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네 오로지 연주를 계속 할뿐, 그의 손풍금은 멈추질 않네 기이한 노인이여, 내 당신과 동행해도 될는지? 내 노래에 맞추어 당신의 손풍금으로 반주를 해줄 순 없는지?